한참 중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멍청한 시비를 주고받던 시절, 우리 때 유행했던 한마디 장난이 내 모든 청소년기 고민의 시작이었다. "너 왜사냐?" 하고 쏘아붇는 말에 장난으로 넘기지 못하고 몇년을 고민하게 되었다.
아마 자존감이 낮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성적이 떨어져 내 스스로의 상태에 자부심을 느낄 상황이 아니었을 지 모른다.
덕분에 나름 철학책들을 한권 두권 읽으며 내 나름의 답을 찾아내는 과정을 거쳤지만, 아직도 이 질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들을 때면 매우 흥미가 생긴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사는가?
내가 찾은 답은 나중에 차차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겠지만,
자신만의 답을 찾았다면 그 답을 향해 나아갈 때 한번 쯤 생각해볼만한 문장이다.
바로 찰리 채플린이 말한 "왜 굳이 의미를 찾으려 하는가?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이다
어릴 적 가지고 놀 던 유희왕카드에는 '욕망의 항아리'라는 카드가 있었다.
효과나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무언가 나쁜 것을 담은듯한 그 카드의 이미지와 사악하고 괴랄한 느낌만 선명하다.
하지만 욕망이란 무엇일까?
욕망은 정말 나쁘고 사악한 걸까?
욕망이란
먼저 자신의 마음 속에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말로 표현하면 '요구'라고 하며, 미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그 간극이 생길 때 '욕망'이라고 한다.
즉 다시 말하자면 욕망이라는 것은 그 단어의 의미 자체로 이미 채워지지못한, 충족되지 못한 무언가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정말 채워지지 못한 무언가, 마음속으로 강하게 열망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까?
어릴 적 인간의 욕심, 욕망은 끝이 없다 라고 배웠지만 살다 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욕망이 끝이 없고 욕심이 끝이 없다면, 왜 어떤 이들은 현재의 자신의 부족한 현실을 타파하고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정말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노력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할 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이나 나태함으로 그 시간을 허비하는 내 또래의 이들을 볼 때 생각하는 점이다. 우리는 욕심이 끝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상황에,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원할 때 원하는 것 사먹고, 그정도 수준에서 아주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또래들은 그런 만족감이 자신이 가진 마음 속 욕구, 표현되지 못한 욕망보다 더 커보인다. 이걸 확신할 수록 에리히프롬에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을 더 믿는다.
나는 군대에 가기 전에 에리히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읽었다.
요는 인간이란 사실 자유를 좋아하지 않고, 인간이 좋아하는 자유는 ~으로부터의 자유, 즉 감옥에 갇히거나, 어떤 필수적인 의식주에 제약을 받을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인 '수동적 자유'이지, 최고의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유라던가 최상의 조각품을 조각할 수 있느 자유라던가 이런 우리가 이르지 못한 경지에 다다르는 자유 아주 적극적인 노력과 성의가 필요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개념을 알고 나니 20대에 군대를 다녀오는 많은 청년들이 군대안에 있을 때는 그렇게 군대에서 나가기만 하면 무언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해낼 것 처럼 말만하다가 막상 집에 가서 따뜻하고 안전하고, 배부른 보금자리에서 다시 그시절의 열망을 잊고 살아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즉 소극적 자유가 극심하게 제한될 때는 그 반작용으로 적극적자유를 향한 열망이 커졌다가 다시 소극적 자유를 손에 얻으면 우리는 만족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군대에서 꼭 무언가 하고 나와야지 나오면 군대에서 얻은 규칙적인 습관을 계속 유지시켜나가야지 했지만 뭐... 내꼴이야 내가 이렇게 반성할 만한 꼴이니.
anyway,
그래서 욕망의 항아리란 무엇일까? 나는 현실에서도 우리 모두가 가진 욕망의 항아리가 정해져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표현하지 못해서 생기는 욕망이 아니라 말만 늘어놓을 뿐인 입뻘구일 수 있으니 요구의 항아리라고 해야할려나?
누군가는 사람 그릇이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독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슨 짓을 해서든 반드시 얻는 독기있는 사람.
원하는 게 크면 그 큰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해 나가는 사람.
난 내가 그렇게 그릇이 큰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욕망이 있는 야심찬 소년도 아니었다는 것을 진즉 알았다... boys be ambitious 는 나를 위한 말은 아니었던거지..
그렇지만 나도 내 딴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 또한 그것을 혼자 이루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안다.
자신이 부족하고 게으른 사람이라면 그 목표를 이루려는 아주 열정적인 집단에 한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것 만으로도 나도 열심히 하게 되는 거니까...
여러가지 장치를 설치해서, 게으르고 나태하고, 욕심도 적은 내가, 아직 체력이 좋고 시간적 여유도 있을 때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해서 내가 원하는 미래를 손에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 그래서 결론은,,,, 인생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하면 자신이 납득할 만한 답을 찾는데 굉장히 오래 걸리고, 종교인이라면 빨리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ENTP 무신론자는,,,,, 훠어얼씬 더 오래걸리고,
그리고 혹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잖아?<<< 이런 가정으로 열심히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삶에 의미에 대한 고찰로 시간을 더 보내고 있다면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상태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기바란다)))
물론 나도 커가면서 한 명 두 명 주변에서 우연히 사고로 돌아가시는 것을 볼 때 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지만 어떻게 보면 내일도 해가 뜨고 내일도 내가 숨 쉬고 있을거라고 당연하게 가정하고 살아가는 게 내 미래를 위한거고, 누구나 종교인이 아니어도 그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서,, 자신의 욕구, 욕망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그걸 이루기위해 살아가는 방향으로 전환하면 좋겠다.
또 자신이 가진 욕망의 크기가 적다면, 자신을,,,,,2D 도트게임의 캐릭터처럼 저 멀리서 제3자로 바라보며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장치를 걸어둔다던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 옆에 붙어있는다던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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