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은 부정문을 모른다
이런저런 글들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생각 외로 퍽퍽하여 늦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늦어질 예정이다. 뿔뿔히 산개해있는 나의 메모들을 누군가 한데 모아주면 좋으련만.
EP.1 최면체험을 다녀왔다.
어떤계기였을까. 다시 무의식과 나의 선택. 자유의지 욕망. 실재계. 이미지를 초월한 이미지. 라깡의 주이상스.
슬슬 나는 다시 마주할 여유를 가진 모양이다. 군대가기전까지만 해도 산에 들어가 명상을 하며 살 것 처럼 굴더니, 전역하고 나자 탈출했다는 해방감을 연소하여 달까지 로케트를 쏘아올릴 것 마냥 적극적 자유를 열망했고, 이제 다시 혼자가 되어 나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보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나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일종의 집착과도 같다.
그런 계기로 비록 라캉은 나의 진짜 욕망이라는 것은 없고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고 하였지만 근래에 관심을 가져 다시 살펴보다보니 그 '타자'에 대한 개념도 일반적인 타인의 개념이 아닌 '대타자' '소타자'등 나 스스로의 자아를 지칭하는 부분이었다는 것이 다시 나를 놀랍게 했다. 라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많은 것들을 다 같이 공부해야하는 듯 한데 이런 얄팍한 서칭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많이 부족했다.
여하튼 다시금 이런 나의 이면의 무의식에 관심을 가져 나는 무작정 최면체험을 받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헤맸다. 왜냐하면 이런 정신분석을 연구한 융?의 데이터로 사람들중 5분의 1은 최면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니 내가 최면에 걸리지 않을수도 있는데 그냥 20만원 30만원 주고 알려진 곳으로 가서 돈을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떠돌다가 최면체험 연습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찾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최면을 경험해보고싶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최면체험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최면에 걸리긴 했지만, 의식을 배제하고 무의식을 꺼내어 말을 하는것은 불가능했고, 얕은 단계의 최면을 경험했다. 그것은 고도의 몰입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이었고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는 큰 숙취가 덥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결국 내가 원했던 것을 모두 경험할 수는 없었지만, 최면사가 최면에 관심을 가진 계기, 최면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어떤 계기로 최면에 관심을 가지는지. 또 그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되어 관심을 가지는 자각몽, 꿈과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정말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꼭 어떤 아픔이나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아라는 의식아래에 무의식이 억눌리게 된다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우리 모두 언어를 구사하고, 언어의 지배를 받아 생각하는 번역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것은 오로지 내부에서 일어난 욕구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자극 그것이 사회에서 가지는 상징과 쓰임 등등, 그러한 모든 것들을 고려하는 번역기 이기에 다른 것들을 차단한 내부의 에너지만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다시 라깡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고 라깡을 알기 위해 소쉬르의 언어학과 구조주의, 프로이트, 그리고 라깡 이후의 지젝에 대한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지만 그러한 텍스트를 이해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가 필요할지 생각하면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당장 블로그의 떠다니는 글만 봐도 대타자와 소타자의 개념이 상징계와 상상계 어디에 위치하는지만 같을 뿐 설명하는 이마다 그 뉘앙스가 달라 정말 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 맞나? 싶다. 또한 라깡 자체도 비트겐슈타인처럼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자기 이론이 변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아 그러한 것들을 모두 시간의 흐름순으로 까지 파악하려면 정말 오랜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겠다. 하지만 매번 라깡과 자아, 무의식, 스스로의 욕망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니 15살때부터 나는 계속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이 지식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또한 이러한 지식을 제대로 적립하고 이제 나만의 창작을 시도한다고 하여도,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 라는 말을 이해한 것과 같이, 상상계와 상징계를 촉진시키는 실재계의 구현을 이루어내는 것 또한 결국 전혀 다른 영역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EP.2 무의식은 부정문을 모른다.
최근 유튜브의 알고리즘대로 떠도는 강신주 선생님의 장자철학 강의를 들었다. 요는 언어에 의해 우리가 속고 있다 라는 이야기였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비가 안오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가 있다'' 라는 것을 전재로 구성되는 문장이다. 하지만 '비가 없다' 라는 상황은 그저 '날씨가 좋다'만이 드러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비가 와야하는 것을 상정하고 비가 안온다 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듣고보니 참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묘사하거나 바라보고 있지 않았구나. 언어가 의도하는대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라깡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을때는 라깡이 어째서 무의식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라고 하게 되었는지 듣다보니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예시를 들자면 이렇다. "나는 거짓을 말할거야" 라는 문장이 있다. 나는 분명 거짓을 말하겠다 라고 의도를 밝히지만 그것은 거짓이기에 진실이 아니다 라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말장난이나 말실수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언어적 실수를 통해 우리의 의식이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구조는 언어가 가지는 은유와 환유의 개념과 매칭되어 무의식 또한 언어적으로 구성된다 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즉, 해를 가리는 월식으로 달이 둥그렇다는 것을 안 것 과 같이, 억압하는 자아의식의 사이로 새어나오는 무의식의 언어를 통해, 무의식 또한 언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놀라운 추론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생각은 이미지를 초월한 이미지, 혹은 언어 이전에 선재하는 무언가 였다. 물론 언어를 배우기 전 단계의 상상계가 존재하는게 맞다면, 그것은 분명 언어에 선재하는 것이겠지만 그것 또한 언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굳이 '언어'라는 형태에 집착할 필요는 없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은유와 환유로 치환되는 이미지이지 않을까. 여하튼 그러한 어설픈 지식을 또 적립하고,
다시금 양과 음에 대한 논제로 돌아와보았다. 선과 악, 빛과 어둠 이러한 것들이 특별히 다른 것은, 원자가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는 2자(물론 원자핵도 또 나뉘지만)적인 존재가 아니라, 빛이 없으면 어둠이고, 선이 부족하면 악인것과 같이 사실 하나만 존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선이 없으면 악이 없고 악이 없으면 선이 없다 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선만 있고 악은 선의부재로 드러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면상태에 빠져 몰입에 빠졌을 때, 어째선지 내 감각적인 부분이 느껴지지 않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을 때 그게 내 무의식이 드러났다는 생각은 전혀 안들었지만, 나와 타인의 구별이 든다는 생각이 희미해진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그냥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인지하는 의식은 나를 '타인'과 '구별하는 힘'을 통해서 생겨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구별하는 힘의 작용이 없다면 나와 나 이외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힘이 작용되지 않은 '원상태'이지 않을까 하는..
여하튼 그러한 일련의 아이디어를 글로 정리하고, 아직도 너무나도 먼 공부를 해야할 자리에 놓여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거야'라는 문장에서 꼭 무의식이 언어구조화 되어있다는 것 말고 어쩌면 '부정문'의 형태는 무의식의 발로가 아닌 자아의 검열을 통해 한번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영어를 처음배울 때도 그 부정형의 표현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의문부정형 이라는 한번 더 꼬은 의문사를 배울 때 어렵게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이것은 사실 무의식은 그저 긍정문 혹은 평서문으로만 생각하고 그것을 제한하거나,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자아가 하는 역할 아닐까.
이 외에도 디태치먼트에서 나온 더블띵크의 개념이나, 히스테리를 드러냄으로써 예술로 승화하는 라깡의 예술에 대한 관점이나, 여러가지 것들을 추가로 목적없이 배회했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내 안에서 남겨두기로 하겠다.